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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소론찬요(華嚴經疎論纂要)』 〈간행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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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24-07-13 14:33 조회1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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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485756ab2700c4f051d564144a0459_1720849 

 

                    혜거스님은 ‘화엄경의 최고 주석서’로 꼽히는 <화엄경소론찬요> 120권을 

                 앞으로 10년에 걸쳐 20권 분량으로 번역할 예정이다.

 

 

『화엄경』은 비로자나 세존께서 보리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성취하신 후, 일곱 도량 아홉 차례의 법문에서 일진(一眞)의 법계(法界)와 제불의 과원(果願)을 보여주시어 미묘한 현지(玄旨)와 그지없는 종취(宗趣)를 밝혀주신 최상의 경전이다. 이처럼 『화엄경』은 법계와 우주가 둘이 아닌 하나로 그 광대함을 말하면 포괄하지 않음이 없고, 그 심오함을 말하면 갖춰 있지 않음이 없어 공간으로는 법계에 다하고 시간으로는 삼세에 통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화엄경』은 근본 법륜으로 중국은 물론 동양 각국에서 높이 받들며 수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어 왔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청량 국사의 『대방광불화엄경소초(大方廣佛華嚴經疏?)』와 통현 장자의 『대방광불화엄경론(大方廣佛華嚴經論)』이다. 소초(疏?)는 철저한 장 구(章句)의 분석으로 본말을 지극히 밝혀주었고, 논(論)은 부처님의 논지를 널리 논변하여 자심(自心)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청량소초와 통현론은 양대 명저(名著)로 모두 수증(修證)하는 데에 지극한 궤범(軌範)이었다.
탄허 대종사께서는 이러한 점을 토대로 통현론을 주(主)로 하고 청량소초를 보(補)로 하여 번역하심으로써 『화엄경』이 동양에 전해진 이후 동양 최초의 『화엄경』 번역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셨다. 일찍이 한국불교에 침체된 화엄사상은 대종사의 번역에 힘입어 다시 온 누리에 화엄의 꽃비가 내려 화엄의 향기로 불국정토를 성취하여 더할 수 없는, 지극한 법륜을 설하셨다.
그러나 대종사께서 열반하신 이후, 불법은 날로 쇠퇴하고 중생의 근기는 날로 용렬하여 방대한 소초와 논을 열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대종사의 『화엄경』을 다시 한 번 밝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모색을 필요로 할 시점에 이르렀다. 보다 쉽게 볼 수 있고 간명한 데에서 심오한 데로, 물줄기에서 본원을 찾아갈 수 있는 진량(津梁)을 찾지 않는다면 대종사의 평생 정력을 저버리게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청대(?代) 도패(道?) 대사는 청량의 소초와 통현의 논 가운데 그 정요(精要)만을 뽑아 『화엄경소론찬요(華嚴經疎論纂要)』를 편집하였다. 이는 매우 방대한 소초와 논을 축약하여, 가까이는 청량 국사와 통현 장자의 심법을 전수하였고 멀리는 비로자나불의 묘체(妙諦)를 밝혀주는 오늘날 최고의 『화엄경』 주석서이다.
이에 『화엄경소론찬요』를 대본으로 하여, 다시 대종사의 번역서를 참고하면서 현대인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서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무상한 세월 속에 감회가 적지 않다. 내 지난날 출가 입산하여 겨우 이레가 되던 날, 처음 접한 경전이 『화엄경』이었다. 행자 생활을 시작한 영은사는 대종사께서 오대산 수도원이 해산된 후, 이의 연장선상에서 3년 결사(結社)를 선포하시고 『화엄경』 번역이라는 대작불사를 시작하여 강의하셨던,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려준 역사의 도량이었다.
그 당시 대종사께서는 행자인 나에게 『화엄경』을 청강하라 하시면서 “설령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들어두면 글눈이 생겨 안 들은 것보다 낫다.”고 권면하셨다. 이제 생각해보면 행자 출가 즉시 『화엄경』 공부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은 전생의 숙연(宿緣)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당시 그 법회에 참석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행운 중 행운으로 다겁의 선근공덕이 아닐까 생각되며, 아울러 늦게나마 대종사의 영전에 하나의 향을 올리는 바이다.
처음 『화엄경』 설법을 듣는 순간, 끝없는 우주법계의 장엄세계가 황홀하고 법계를 맑혀주고 무진 보배를 담고 있는 바다의 불가사의한 공덕이라는 대종사의 사자후가 머릿속에 쟁쟁하게 울려왔을 뿐, 그 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근기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쭉정이만도 못하다.”고 꾸지람을 하시던 대종사의 방할(棒喝)을 맞으며 영은사에서의 결사가 끝난 후, 나는 단 한 번도 『화엄경』을 펼쳐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몇 해 전, 무비 스님께서 범어사에서 『화엄경』을 강좌하시면서 서울에서도 『화엄경』 강좌를 열어보라고 권할 적만 하더라도 언감생심 『화엄경』을 강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씨앗을 뿌려놓으면 새싹이 돋아나듯, 반드시 인연법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영은사에서의 『화엄경』 인연이 자곡동 탄허기념박물관에 화엄각건립불사를 발원하게 되었고, 화엄각건립불사를 위하여 『화엄경』 강좌를 열기에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미력한 소견으로 강좌를 열면서 정리된 강의 자료를 여러 뜻있는 이들과 다시 한 번 토론하고 강마하면서 우선 〈세주묘엄품〉부터 출간하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연차적으로 간행할 예정이다. -『화엄경소론찬요(華嚴經疎論纂要)』 〈간행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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